![]()
많은 사람들이 명리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고 더 정의로워질 거라고 믿는 마음, 그것이 내가 줄기차게 ‘만인(萬人)의 명리학자화(命理學者化)’를 부르짖는 이유다. 어려울 것, 없다.
— 강헌, 『명리: 운명을 읽다』에서
강헌의 강의는 팝송 한 곡에서 세계사의 격동기로 건너간다. 명리학 고전의 개념이 역사 속 인물의 파란만장한 생애로 이어진다.
이력을 봐도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종잡기 어렵다. 독립영화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음악평론가, 문화계간지 편집자, 음악극 연출가, 콘서트 기획자, 와인바 오너, 미식 팟캐스트 진행자, 문화재단 대표, 그리고 명리학자.
고등학생 강헌은 장학금을 받아들고 부산 서면의 레코드 가게로 향했다. 회고에 따르면, 클래식 음반을 A부터 Z까지 골라 ‘이거 다 주세요’라고 주문했고 결국 용달차를 불러 싣고 돌아왔다.
소설가를 꿈꾸며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졸업 후에는 음악대학원을 택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전공을 바꾼 이유를 묻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입대를 미루고 싶었고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제2외국어를 보지 않는 곳이 음대였다고.
하지만 음악을 향한 애정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음악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의 반백년 삶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나를 위안하고 나를 고무한, 그리고 나를 잠들게 하거나 분노케 한 수많은 음악가들의 초상이 스쳐 지나간다.
— 강헌, 『전복과 반전의 순간』 1권, 서문 중
1980년대 후반,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를 이끌며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등을 만들었고, 영화 사전검열에 맞선 법적 다툼에도 나섰다. 동료들이 감독을 꿈꾸는 동안 제작을 맡았다. 제작비를 구하고, 배급한 영화의 대금을 받아오는 일이 강헌의 몫이었다. 검열에 맞섰던 시절을 말하다가도 장산곶매 대표가 된 건 ‘수금 실력’ 덕분인 것 같다고 슬쩍 덧붙인다.
세상을 떠난 가수 김현식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후배의 부탁에 응하면서 음악평론을 시작했다. 한 편의 글이 음악평론가로서의 출발점이 되었다. 영화 작업도 계속해 상업영화 《정글스토리》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썼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계간 《상상》과 《리뷰》 같은 문화잡지를 또래 동료들과 만들며 비평의 지면을 넓혔다. 주목한 것은 노래가 탄생한 시대와 사회, 음악을 만든 사람들의 욕망과 갈등이었다. 블루스와 재즈, 록과 팝의 변화에서 인종과 계급, 정치와 경제의 역사를 읽어냈고, 이러한 시선은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도 담겨 있다. 대학에서는 오랫동안 대중음악사를 가르쳤다.
공연과 음반 제작에도 나섰다. 검열철폐기념 콘서트 《자유》와 《노동의 새벽》 헌정 프로젝트를 기획·총괄했고, 음악극의 대본을 쓰고 무대를 연출했다.
먹는 일에도 진심이었다. 와인바를 운영했고, 팟캐스트는 제목부터 《걸신이라 불러다오》였다. 음식과 와인 이야기로 《강헌의 와인야부리》 같은 강의도 열었다.
2004년, 대동맥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고 23일 동안 사경을 헤맸다. 가까스로 깨어난 뒤, 오래전 친구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흔을 갓 넘겨 생사의 고비를 맞을 것이라는 사주 풀이였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했을까.
삶이 황폐해진 시절, 운명 앞에서 처음으로 겸허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자기 삶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그 해답의 틀로 명리학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운명에 관해 강헌은 이렇게 말한다.